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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악명높은 철학서 <<존재와 시간>>을 가지고,

 

'죽음'에 관하여 논하는 첫 번째 글 <현존재 : 존재 물음의 시작> 시작하겠습니다.

 

솔직히 독일 사람들도 독일어로 따로 번역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하이데거만의 고유 용어와 합성어가 많아

한국어 번역판은 그야말로 외계어가 따로 없습니다.

 

그래도 중요한건 한줄 한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문단 전체의 뉘양스를 파악하는게 중요하기에

이를 기반으로 같이 공부해 봅시다.

 

[목차]

 

1. 현존재의 정의

 - 현존재

 - 그들

 - 실존

 

2. 빠져있음

 - 잡담

 - 호기심

 - 애매함

 

3. 죽음에 대한 사유의 시작

 - 공포와 불안의 비교

 - 죽음에 대한 존재물음

 

**가독성을 위해 평어체로 썼습니다.


1. 현존재의 정의

 철학의 역사에서 '존재'는 망각되어 왔다. 우리는 '존재'라는 단어에 더 세부적인 해석을 원하지도, 할 능력도 없다.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용어로서의 '존재'는 철학의 역사에서 조차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다. 실제로 데카르트 또한 진리로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만큼 '존재'는 우리의 생각속에 너무나 당연하고 사상의 기저가 되는 것으로 자리잡혔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존재'에 대해 아무런 탐구를 하지 않아도 될까?

즉, '존재란 무엇인가?' 에 대해 사유해볼 가치는 없는 것일까.

 

하이데거는 말한다. 그 무엇보다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중요하다고. 

그 과정에서 '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존재'를 '현존재(Dasein)'라 칭한다.

 

우리가 '존재'에 대해 사유한다면 우리는 '현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현존재'가 아니다. 

즉, 우리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현존재로서 살지 못했다. ('존재'에 대해 탐구/의문을 가진적이 거의 없으므로)

 

존재에 대해 이렇듯 사유하는 존재가 존재와 관계맺는 방식을 '실존(Existenz)'이라 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바위는 존재하지만 실존하지 않는다
말은 존재하지만 실존하지 않는다
신은 존재하지만 실존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실존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바위, 말은 스스로를 인지하기 힘들테니 현조재가 될 수 없고 따라서 실존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은 실존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한번 스스로 생각해보자.

 

.

.

.

.

 

결론부터 다시 말하자면, 신은 실존하지 않는다. 

신은 전지전능전선 하기에 모르는 것이 없고 어떤 것에 대하여 탐구할 필요가 없다. (이미 다 아니까)

이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탐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기에, 신은 스스로 존재물음을 던질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신은 실존할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이 현존재로서 실존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앞으로 <<존재와 시간>>을 현존재로서 공부해 나가보자.

 


 

2. 빠져있음(퇴락, Verfallen)

 이 부분의 내용은 따로 에세이도 쓸 예정인데, 현대 사회의 문제점과 밀접하게 닿아있다.

 

하이데거는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들(세인, das Man)' 속에 파묻혀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들' 이란 현존재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탐구하지 않는 자들을 말한다. 마치 '그들'을  '대중'이라고 받아들여도 좋다.

당연한 소리지만, 하이데거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탐구하지 않는 '그들'을 부정적으로 본다. 

 

 즉, 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현존재'로서 살아가더라도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들'이기에 항상 주변을 비판적 시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빠져있음(퇴락, Verfallen)'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빠져있음'은 3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1) 잡담(Gerede)

(2) 호기심 (Neugier)

(3) 애매함 (Zweideutigkeit)

 

하나씩 살펴보자.

 

빠져있음 - 1) 잡담(Gerede)

존재와 시간(p.231)
존재와 시간(p.231-232)

 보면 알겠지만 말이 너무 어렵다. 괴랄한 용어도 있고.

정리하자면 '잡담'은 마치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의 일반적 통념' 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를들어, '쇼츠는 우리 뇌를 망가뜨린다' 라는 말을 어디서 한번 들어봤을 것이다. (재밌는 사실은 쇼츠가 나쁘다는 이 주장 또한 쇼츠에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쇼츠는 우리 뇌를 망가뜨린다'
정말로??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저 전문가가 말했기에? (전문가는 맞는가?)

그러니까 '쇼츠는 우리 뇌를 망가뜨린다'는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는가?
근거를 생각해 보았는가?

그럴 확률은 지극히 낮아보인다.

이렇듯 우리는 세인(das Man)들에게 둘러싸여 여러가지 정보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삶을 살아간다.
물론, 변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 따져보기에는 정보가 너무 방대하고, 현대 사회는 숨가쁘게 흘러가기에 비판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무엇이 옳은 자세인지는 잘 알 것이다.
하나하나 따져보지는 못하더라도, 가끔은 의심해보자. 

'정말 그러한가?' 

라고.

 

다음으로 호기심에 대해 알아보자.

 

빠져있음 - 2) 호기심 (Neugier)

존재와 시간 (p.234)
존재와 시간 (p.236)

'그저' 보기 위해서 보려고 애쓴다.
호기심이 새로운 것을 찾는 이유는 그 새것에서 다시금 새로운 새것으로 뛰어들기 위해서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쇼츠'와 '릴스' 가 떠올랐다.
소름돋지 않는가?

그저 멍한 눈으로

더 강한 자극
더 새로운 것
더 흥미로운 것

을 찾아 다니며 쇼츠와 릴스를 계속해서 넘겨대는 우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무서운건  우리 스스로도 이러한 단발적 '호기심'이 하등 쓸모없는 짓임을 잘 알고있다.

도파민에 중독된 우리들의 모습은
'호기심'에 빠져있는 세인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애매함에 대해 알아보자.

 

빠져있음 - 3) 애매함 (Zweideutigkeit)

존재와 시간 (p.237-238)

 잡담이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대중의 통념을.
 호기심이 새로운 것만을 찾아대는 세인들의 부정적 모습을.

뜻했다면, 애매함은 더 이상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사회 전체를 이야기한다.
즉, 잡담과 호기심이 판치기에.

이미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통념이 오랜 시간 세인들 사이를 거쳐갔기에
더 이상 이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을 말한다.

참으로 슬픈 상황이다.

 


3. 죽음에 대한 사유의 시작

 

 가끔 우리는 무엇인가 공허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아니 그 이전에.

 

'나는 뭐지?'

 

처럼 대상을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인다. 

하이데거는 이를 공포가 아니라 '불안'이라 칭한다.

 

즉,

 

우리가 어떤 재난을 두려워 한다면

그것은 재난을 대상으로 한 공포이다.

 

우리가 연쇄 살인마를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연쇄 살인마를 대상으로 한 공포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대상을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이를 불안(Angst)이라 한다.

 

공포와 불안은 대상이 있냐 없냐에 따라 나뉜다.

 

대상이 있으면 공포

대상이 없으면 불안 이다.

 

불안과 유사한 것으로 섬뜩함(Unheimlichkeit)이 있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우리의 존재/죽음에 대해 사유를 시작할 떄

 

불안과 섬뜩함의 원천을 파헤칠 수 있게 된다.

 

즉, 죽음은 존재물음의 계기이자 하나의 가능성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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